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맛 브랜드 남도미향의 터전인 전라남도에서 지난 10월 9, 10, 11일 3일간 대규모 축제 '명랑대첩축제'가 열렸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이 울돌목의 거센 물살과 전라민초들의 화합된 힘을 바탕으로 412년 전 기적의 승리를 거둔 명량대첩을 재현하고 국난시 국민이 화합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제시한 ‘2009명량대첩축제’!! 자랑스럽고도, 아름다운 축제가 된 하루들^^
명랑해역 양 가장자리에 '고뇌하는 이순신'과 '지휘하는 이순신'이 마주보며 서 있다.
이순신의 인간적인 모습과 장군으로서의 위용이 석양을 배경으로 비장감을 자아내고 있다.
412년 전 명량해전이 벌어졌던 울돌목 역사의 현장에서 조선바다의 재현과, 평화 메세지를 보내기 위해 이순신 장군 후손, 조명연합군의 진린장군 후손, 왜장 구루시마 장군 후손을 비롯해 난중일기에 기록된 의로운 민초 오극신, 양응지 후손 등 한중일 관계자들이 화합하는 자리도 마련되었던 지난 주의 축제 '명랑대첩축제'
3일간의 대장정을 마친 명량대첩축제에는 신종플루 영향에도 불구하고 32만여명의 관광객이 다녀갔으며 특히 8천500여명의 외국인들이 몰려와 명량대첩 재현행사와 한국 민속문화에 경이적인 반응을 보여 세계적인 관광상품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이는 올해보다 축제 기간이 하루 더 길었던 지난해(31만명)보다 1만명이 늘어난 것입니다.
특히 11일 두번째 해전 재현은 지극히 사실적이고 박진감 넘치게 펼쳐져 관광객들의 박수갈채가 이어졌으며 재현행사에 참여했던 어민들도 덩달아 어깨춤을 췄습니다.
이어 벌어진 만가행렬에서도 상여 7기가 진도대교를 꽉 메웠고 만장깃발만도 700여기에 상여꾼이 1천여명에 달해 일대 장관을 연출했습니다.
축제 전문가들은 “철저하게 역사적인 사실을 재현하면서도 영화적인 요소를 가미해 재미를 부가함으로써 이름 그대로의 축제를 펼쳐보였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직접 축제에 참여한 주민들도 한결같이 “지금까지 보아온 축제중 가장 재미있고 볼거리가 많았으며 직접 참여하는 ‘초요기를 올려라!’, 어선들이 참여하는 ‘명량 13대 133’, ‘500여개의 깃발을 들고 가는 만가행렬’ 등은 타 축제와는 차원이 다른 축제였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남도미향의 터전인 전라남도의 문화컨텐츠들이 날이가면 갈 수록 다양해지고, 그 수준 또한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전라남도의 명랑대첩축제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축제로 자리잡아 해외여행객들의 발을 이끄는 축제가 되길 기대합니다.
*참고: 명랑대첩
1597년(선조 30)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명량에서 일본수군을 대파한 해전.
명량대첩
1597년 일본군이 2번째 조선에 침입해 정유재란이 일어났는데, 일본군의 재침략이 있기 직전인 그해 1월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모함을 받아 하옥되었다. 이순신을 대신해 통제사가 된 원균은 일본군에 대항했으나, 대패하고 전사해 수군은 전멸상태에 빠졌다. 사태가 긴급해지자 정부는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해 적을 막도록 했는데, 이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군사 120명과 병선 12척뿐이었다. 일본군이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해 서해로 진출하려 하자,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해서 12척의 전선을 수습해 이진(利津)·어란포(於蘭浦) 등지를 거쳐 8월 29일 벽파진(碧波津)으로 이동했다. 일본수군은 벽파진에서 기습작전을 전개했으나 조선수군의 철저한 경계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순신은 명량을 등뒤에 두고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보아, 9월 15일 우수영(右水營 : 해남군 문내면)으로 수군을 옮겼다. 명량은 간만(干滿) 때 바다가 소리를 내며 급류하는 좁은 목이었으므로, 좁은 목과 조류를 이용해 적은 수의 전선으로 많은 수의 적선과 대치하고자 했다. 다음날 새벽 일본수군 133척이 명량으로 진입하자, 이순신은 명량으로 들어서면서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해 적을 향해 돌진하면서 현자(玄字)·지자(地字)의 총통(銃筒)을 쏘았다. 그리고 이순신은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중군(中軍) 김응함(金應) 등을 독려해 적진으로 돌진시켰는데, 적선 3척의 일본군이 안위의 배에 올라 격전이 벌어졌고, 이순신은 총통을 쏘아 3척을 불질렀다. 군사력은 일본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이순신은 후퇴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마침 북서류하던 해류가 점차 남동류로 바뀌어 상대적으로 조선군에게 유리해졌다. 이때 안골포해전에서 투항했던 왜인 준사(俊沙)가 적선을 내려다보고 일본의 수군장수 구루시마[來島通總]를 가리켜주자, 이순신은 그를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았다. 이에 일본수군이 분노해 일제히 덤벼들자 이순신은 총통과 불화살을 쏘아대며 방향이 바뀌는 조류를 이용해 공격함으로써 일본 병선 31척을 격파했고, 일본수군은 달아나버렸다. 이 해전은 12척의 배로 10배 이상의 적을 크게 이긴 싸움으로 정유재란의 대세를 바꾸고, 이후 일본수군은 서해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충무공 이순신이 울돌목의 거센 물살과 전라민초들의 화합된 힘을 바탕으로 412년 전 기적의 승리를 거둔 명량대첩을 재현하고 국난시 국민이 화합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제시한 ‘2009명량대첩축제’!! 자랑스럽고도, 아름다운 축제가 된 하루들^^

이순신의 인간적인 모습과 장군으로서의 위용이 석양을 배경으로 비장감을 자아내고 있다.
412년 전 명량해전이 벌어졌던 울돌목 역사의 현장에서 조선바다의 재현과, 평화 메세지를 보내기 위해 이순신 장군 후손, 조명연합군의 진린장군 후손, 왜장 구루시마 장군 후손을 비롯해 난중일기에 기록된 의로운 민초 오극신, 양응지 후손 등 한중일 관계자들이 화합하는 자리도 마련되었던 지난 주의 축제 '명랑대첩축제'
3일간의 대장정을 마친 명량대첩축제에는 신종플루 영향에도 불구하고 32만여명의 관광객이 다녀갔으며 특히 8천500여명의 외국인들이 몰려와 명량대첩 재현행사와 한국 민속문화에 경이적인 반응을 보여 세계적인 관광상품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이는 올해보다 축제 기간이 하루 더 길었던 지난해(31만명)보다 1만명이 늘어난 것입니다.
특히 11일 두번째 해전 재현은 지극히 사실적이고 박진감 넘치게 펼쳐져 관광객들의 박수갈채가 이어졌으며 재현행사에 참여했던 어민들도 덩달아 어깨춤을 췄습니다.
이어 벌어진 만가행렬에서도 상여 7기가 진도대교를 꽉 메웠고 만장깃발만도 700여기에 상여꾼이 1천여명에 달해 일대 장관을 연출했습니다.
축제 전문가들은 “철저하게 역사적인 사실을 재현하면서도 영화적인 요소를 가미해 재미를 부가함으로써 이름 그대로의 축제를 펼쳐보였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직접 축제에 참여한 주민들도 한결같이 “지금까지 보아온 축제중 가장 재미있고 볼거리가 많았으며 직접 참여하는 ‘초요기를 올려라!’, 어선들이 참여하는 ‘명량 13대 133’, ‘500여개의 깃발을 들고 가는 만가행렬’ 등은 타 축제와는 차원이 다른 축제였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남도미향의 터전인 전라남도의 문화컨텐츠들이 날이가면 갈 수록 다양해지고, 그 수준 또한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전라남도의 명랑대첩축제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축제로 자리잡아 해외여행객들의 발을 이끄는 축제가 되길 기대합니다.
*참고: 명랑대첩
1597년(선조 30)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명량에서 일본수군을 대파한 해전.
명량대첩
1597년 일본군이 2번째 조선에 침입해 정유재란이 일어났는데, 일본군의 재침략이 있기 직전인 그해 1월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모함을 받아 하옥되었다. 이순신을 대신해 통제사가 된 원균은 일본군에 대항했으나, 대패하고 전사해 수군은 전멸상태에 빠졌다. 사태가 긴급해지자 정부는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임명해 적을 막도록 했는데, 이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군사 120명과 병선 12척뿐이었다. 일본군이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해 서해로 진출하려 하자,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해서 12척의 전선을 수습해 이진(利津)·어란포(於蘭浦) 등지를 거쳐 8월 29일 벽파진(碧波津)으로 이동했다. 일본수군은 벽파진에서 기습작전을 전개했으나 조선수군의 철저한 경계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순신은 명량을 등뒤에 두고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보아, 9월 15일 우수영(右水營 : 해남군 문내면)으로 수군을 옮겼다. 명량은 간만(干滿) 때 바다가 소리를 내며 급류하는 좁은 목이었으므로, 좁은 목과 조류를 이용해 적은 수의 전선으로 많은 수의 적선과 대치하고자 했다. 다음날 새벽 일본수군 133척이 명량으로 진입하자, 이순신은 명량으로 들어서면서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해 적을 향해 돌진하면서 현자(玄字)·지자(地字)의 총통(銃筒)을 쏘았다. 그리고 이순신은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중군(中軍) 김응함(金應) 등을 독려해 적진으로 돌진시켰는데, 적선 3척의 일본군이 안위의 배에 올라 격전이 벌어졌고, 이순신은 총통을 쏘아 3척을 불질렀다. 군사력은 일본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이순신은 후퇴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마침 북서류하던 해류가 점차 남동류로 바뀌어 상대적으로 조선군에게 유리해졌다. 이때 안골포해전에서 투항했던 왜인 준사(俊沙)가 적선을 내려다보고 일본의 수군장수 구루시마[來島通總]를 가리켜주자, 이순신은 그를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았다. 이에 일본수군이 분노해 일제히 덤벼들자 이순신은 총통과 불화살을 쏘아대며 방향이 바뀌는 조류를 이용해 공격함으로써 일본 병선 31척을 격파했고, 일본수군은 달아나버렸다. 이 해전은 12척의 배로 10배 이상의 적을 크게 이긴 싸움으로 정유재란의 대세를 바꾸고, 이후 일본수군은 서해로의 진출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9/10/12 17:35
2009/10/12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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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2 16:49